소리사주 소개 시각장애인 역리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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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역리업의 역사

  • 시각장애인 점복에 관한 기록은 고려 원종조의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충렬왕 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고려조에서는 태복감을, 조선시대에는 관상감을 설치하여 맹인점복
    행정을 관장하였으며, 세조 12년 1466년에는 풍수학이 지리학으로 음양학
    이 명과학으로 각 각 개칭됨에 따라 천문학, 풍수학, 음양학 등 3과가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등의 음양 3과로 바뀌었으며 명과학은
    관상감의 음양3과의 하나로 운명,길흉,화복을 판단하는 학문이다.
  • 시각장애인 점복을 관정한 행정관청
태복감

「고려 시대」에 풍수(風水), 음양(陰陽)·술수(術數) 등의 복서(卜筮)와 관련되는 일을 관장하였던 천문·기상 관측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현종 14년(1023)에 ‘사천대’로 고쳤다. 감(監)·소감(少監)·사관정(四官正)·승(丞)·복박사

(卜博士)·복정(卜正) 등의 관원이 있었고, 국초에는 태복감과 태사감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운관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천문(天文), 역수(曆數), 측후(測候), 각루(刻漏) 등의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조선 건국」후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1392년(태조 1년)에 서운관을 설치하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이 관청은 주로 천문, 재상 (災祥), 역일 (曆日), 추택(推擇) 등의 일을 맡았다고 한다.그러나 순조 18년(1818) 천문학자로 관상감에 근무하던 성주덕(成周悳)이

편찬한<<서운관지,書雲觀志>>에는 보다 자세하게천문, 지리, 역수, 점주(占籌), 측후, 누각 등의 업무를 관장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점주는 길흉을 점치는 것인데, 당시 천문이나 지리현상을 해석하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 관측 시설로는 경복궁과 북부광화방(北部廣化坊)에 간의대(簡儀臺)를 두어 많은 천문현상을 관측했으며, 정확한 기록들을 <<실록>>에 남기고 있다.

관상감

「조선시대」천문·지리학(地理學)·역수(曆數:책력)·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을 말한다.

「삼국시대」이후 천문관측 기구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설치했다. 백제에는 누각박사(漏刻博士)·역박사(曆博士)·일관(日官)등의 관직이 있었고, 고구려에는 일자(日者)라는 관직이 있었으며, 신라에는 누각전이 설치되고 천문박사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점서 (占筮:점치는일)를 주요 업무로 하는 기구로 초기부터 있었던 태복감(太卜監)을 계승한 사천대 (司天臺)가 있었고 실질적으로 천문관측의 업무를 담당한 태사국(太史局)이 있었다. 그런데 태사국은 사천대보다 관부로서의 지위가 낮고 사천대에 종속되었으므로 점서적 측면이나 천문상의 이상현상에 집착하게 되고 천문현상에 대한 법칙의 탐구가 결여되었다. 이후 사천대는 사천감·관후서(觀候署)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08년 (충렬왕 34) 태사국과 병합하여 서운관(書雲觀)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1425년(세종 7) 서운관(書雲觀)을 개칭하고 관원 20명을 선발하여 천문을 교습시켰다. 연산군때 사력서로 개칭하

였다가 중종 때 다시 원명으로 환원하였다. 특히 잡과의 하나인 음양과(陰陽科)에 합격한 인원은 초시에서 천문학 10명, 지리학 4명, 명과학 4명을, 복시에서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명과학 2명을 뽑았다.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이 찍힌 백패를 주었다. 합격자는 일단 관상감의 권지(權知)로 배속되었는데,1등은 종8품직, 2등은 정9품직, 3등은 종9품직을 주었다. 이미 품계를 가진 자는 그 품계에서 1계를 더 올려주고, 올린 품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경우에는 거기서 다시 1계를 올려주었다.
그리고 관상감의 권지(權知:견습)로서 분속시켰다가,자리가 나는 것을 기다려 실직(實職)을 주었다.
관상감의 직제(職制)와 인원에는 다소 변동이 있었으나 한 말까지 이어지다가 1894년(고종31) 폐지하고 관상소(觀象所)로 고쳤다. 유적인 일영대(日影臺)가 서울종로구 계동에 보존되어 있다.